1517세기백자
페이지 정보
작성일 21-09-17 20:55
본문
Download : 1517세기백자.pptx
따라서 조선전기 청화백자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진정한 전성기를 이룩하였던 것으로 …(To be continued )
설명
세기백자,기타,레포트
Download : 1517세기백자.pptx( 12 )
1517세기백자
레포트/기타
1517세기백자 , 1517세기백자기타레포트 , 세기백자
다. 광주 관요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거듭 발달하였다. 코발트 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(回回靑)이라 불렀으며,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(China)에서는 유리청(釉裏靑) 또는 청화백자(靑花白瓷)라고 하고, 한국에서는 화사기(畵沙器) 또는 청화사기라고 불렀다.
_SLIDE_6_
유입과 발전
중국(China)의 청화백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28년(세종10년) 명나라에서 전해진 것
한국에서 청화백자를 번조하기 처음 한 것은 1457년(세조 3년) 중국(China)에서 회청이 수입된 뒤부터이며, <세조실록>에 따르면 1465년(세조 11년)에 최초의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
1469년 <경국대전>에 따르면 사옹원 소속 사기장 380명이 사기를 제작하였고 명대 청화를 모방하였다 한다.순서






1517세기백자
_SLIDE_1_
_SLIDE_2_
_SLIDE_3_
청화백자(15~16세기)
철화백자(17세기)
청화백자와 철화백자의 문양 비교
歷史적 고찰
_SLIDE_4_
청화백자란?
백토로 기형(器形)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(回靑) 또는 토청(土靑)이라 불리는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생기게 만든 자기
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해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(China)에서 수입하였다.
1469년(예종 1년)에는 전남 강진 산(産) 토청으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고, 그 후에는 중국(China)에서 수입한 회청이 함께 사용되었다.
_SLIDE_7_
유입과 발전
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 무렵에는 이미 중국(China)양식에서 탈피하여 조선적 특색이 양식적으로 정착된다된다.
_SLIDE_5_
출토지
청화백자는 경기 광주군을 중심으로 번조되었는데, 이 일대의 수많은 관요(官窯) 터가 그것을 말해준다. 그러나 16세기 중반경이 되면서 문양이 흐트러지고 도식화 되면서 전체적인 질과 격이 떨어지는 양식적 alteration(변화) 가 일어나게 된다된다.